존재와 행위


이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고, 참과 거짓 혹은 평등과 차별의 문제도 아니다.
'존재'와 '행위'의 문제이다.
그리고 공감능력이나 상상력이 있는가 혹은 없는가의 문제이다.

#장면1
어제 저녁 아들과 동네 팥빙수 가게에서 팥빙수를 먹었다.
열심히 일하는 가게 주인을 얼핏 보니 매우 예쁘장하게 생겼다. 하지만 분명히 남자다. 성별을 쉽게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제법 눈에 띄게 치렁거리는 귀걸이에다 상당히 공들여서 화장도 한 듯하다.
가게 주인의 꼴(?)에 속이 좀 불편하다. 그래서 내가 아들에게 뭐라 한 마디를 했는데, 나의 불편한 속내가 그 말에 뭍어나왔나 보다.
아들이 상당히 강력하게 지적을 한다. 자유로운 자기 표현이니까, 누구도 그 자유를 가지고 뭐라 할 수 없다는 취지의 따끔한 훈시(?)이다. 나도 질 수가 없다.
"야 임마~ 아무리 자기 표현이라고 해도그렇지, 주변 사람들의 평범하고 건강한 정서를 심히 불편하게 하는 것까지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다 용서된다고 할 수 없지. 짜식아~"
"불편하면 안 보면 되는 겁니다. 그걸 굳이 보고 느끼고 평가하고 지적하는 게 옳지 않은 거예요."
그러다 옛날 골프장 사우나에서 온몸에 문신을 한 사람이 탕으로 들어올 때 목욕탕의 모든 사람이 탕에서 모두 나가버린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표현이 모두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모범 사례로 제시했다.
그럼에도 아들은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계속 주장하며 뻗댔다.
아무래도 내가 그놈 빡센 논리에 적잖이 밀렸던 것 같았지만, 더 논쟁을 끄는 것은 체면 유지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 쓴 입맛을 다시며 중단했다.

#장면2
오늘 아침에 아들과 함께 출근했다.
방학 기간 동안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기에, 내가 서울에 있는 동안에는 함께 출근을 한다.
월요일 아침 러시아워라서 지하철이 무척 붐볐다. 한 대를 보내고 다음 차를 탔다. 사람들 틈에 끼여서 잠깐 몸의 자리를 잡았는데, 묘한 냄새가 난다. 내 바로 앞에 비대한 체구의 서양 여성이 있다. 땀을 비오듯이 흘린다. 그녀의 목덜미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티셔츠에는 군데군데 젖은 자국이 드러난다. 그건 그녀의 체취였던 것이다. 백인들의 체취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직접 느낄 기회는 없었는데.. 이렇게 움쩍할 수 없이 밀착해서 제대로 경험하기는 처음이다. 고통스럽다. 옆으로 좀 피했더니, 그 빈틈으로 밀려들어와 더 가까워진다.
옆에 있는 아들을 보았다. 나보다 더 견디기 힘든 모양이다.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거나 하늘을 보기도 하고, 그러다 나를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다행히 이 지하철을 타는 시간은 15분 정도에 불과하다.

#장면3
환승을 위해 걸어가면서 그 상황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아들은 사람에 대해 그토록 살의에 가까운 증오심이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고, 그 상황의 끔찍한 고통을 말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이런 시간에 지하철을 타면 안된다고 비난한다.
내가 말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의도해서 그런 게 아니지 않느냐. 그 사람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대중 교통을 이용하여 다닐 권리가 있고, 어딘가로 출근하여야 한다면 그걸 말릴 수 없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그 사람은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겪을 불편이나 고통을 제대로 모를 것이다.
남의 고통에 대해,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고, 동시에 그것을 의식하지도 않았다면, 그 사람을 어찌 비난할 수 있는가'
아들은 다행히 쉽게 동감한다고 말해준다.

#장면4
지하철을 내려 사무실로 가면서, 오늘 아침의 경험을 어제 저녁의 '자기 표현의 자유'와 함께 논의하면서 대충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 '행위'는 비난받을 수 있다. 행위는 행위자의 자유 의지에 기초한 것이기에, 적극적으로 타인의 신체나 정서를 해치는 행위는 용서되기 어렵다. 그것이 설사 자신 스스로에 대한 자기 표현이라 하더라도.
- '존재'는 어떤 경우에도 비난 받아서는 안된다. 모든 인간은 그 존재, 피부색, 모습, 출신, 종교 등의 이유로 피해를 받아서는 안된다. 그 존재 등이 비록 다른 인간들에게 호불호나 불편의 이유는 될 수 있을지라도, 박해나 배척의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 이유로 인해 보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 이 문제를 생각하는 매우 좋은 잣대는 공감 상상력이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나 자신 혹은 내 자식이나 가족일 때를 상상해보면 된다.
상대방의 입장을 공감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이 느낀 감정에 따라 상대를 재단하고 평가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복잡한 지하철 내에서 불편한 체취를 발산하는 사람은 제거대상인 악이다.
하지만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상상해볼 수 있다면 전혀 다른 생각으로 귀결될 수 있다. 생각해보자. 만약 내 피붙이 중 누군가가 복잡한 지하철 내에서 체취로 주변 사람들을 심히 불편하게 하는 체질이라면,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아야 할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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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함양 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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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아내가 다니는 창원대 박물관대학에서 함양으로 역사탐방을 간다기에 따라 나섰다. 생면 부지의 사람들 사이에 끼여간다는 게 좀 뻘쭘하긴 했지만, 약 15년 전에 가봤던 함양의 아름다운 풍광이 떠올라 거기에 어떤 역사적인 배움꺼리가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간만에 아내와 바람쐬러 가고 싶기도 하여 따라 가겠다고 했다. 

정말 귀한 경험을 하였다. 평소 가져볼 수 없는 멋진 시간을 즐기고 왔다. 함께 간 그 분들은 평소 자주 경험해서인지 비교적 덤덤하게 다니셨는데, 나 혼자서만 신이 나서 이리저리 나다니며 사진을 찍어대고 한마디 한마디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옛날 경상도의 어른들은 먼 산골오지의 생활을 예로 들 때 '저 해명산청에 가면'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 '해명산청'이 지리산 자락의 함양과 산청이라는 것을 다 자라서 알게 되었다. 약 15년 전 인산죽염 김인세 대표의 초대로 지리산 높은 곳에 자리한 인산죽염 연수원을 방문했을 때, 마침 함양의 산길 도로를 따라 벚꽃이 너무나도 화려하게 피어있어 산골 꽃마을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던 적이 있다. 그곳에 무슨 역사가 있을까.

창원대 박물관의 학예사가 자료를 꼼꼼히 많이도 준비해왔다. 근데 이제 눈이 가버려서 작은 글씨의 글이 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료는 옆으로 제쳐두고 학예사의 설명을 귀로 듣고 눈으로 들어오는 실물 정보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 번 기행의 타이틀이 흥미롭다. 
"함양을 弄하다"
학예사가 설명한다. 농(弄)은 '희롱할 농' 자로 불리지만, 구슬 옥(玉)과 받들 공(廾)으로 이루어져, 정성을 들여 솜씨있게 다룬다는 의미로서, 농현(弄絃), 농월(弄月) 등으로 활용된다고.


**
출발은 1019년 7월 13일 아침 8시반. 창원대.

기행 동선은 대충 다음과 같다.
1. 용추폭포 -> 2. 옛 장수사 터 -> 3. 연암 박지원의 물레방아 시원지 -> 4. 광풍루 -> 5. 거연정 -> 6. 군자정 -> 7. 동호정 -> 8. 농월정 -> 9. 남계서원 -> 10. 일두고택 -> 11. 상림.

하루에 모두 소화하기에 만만치 않은 스케줄이있지만,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어하는 학예사의 열정에 고마움의 탄사가 절로 나왔다.

**
이런 여행을 다녀보면 일정 중에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많이 찍어두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 잘 남아있지 않다. 기억이 따끈따끈하게 남아있을 때 어떻게 해서든 대충이라도 정리를 해두면 언젠가는 자료로서 요긴하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항상 주장하는 것!
"기억은 사라지고 기록은 남는다."

그럼 이제부터 사진을 보면서 기억을 되새겨본다. 


1. 용추폭포


첫 방문지 용추(龍湫)폭포. 시원한 물소리가 참 좋다.
여기에도 어느 폭포에나 가면 들을 수 있는 가련한 이무기의 전설이 있다.
108일의 금식 수련 기간을 단 하루 착오하여 용이 되지 못하고 추락한...
어떤 분이 그래서 용이 추락하였다고 '용추'라고 하는가 보다라고 말씀하신다. 찾아보니 용추의 추(湫)는 웅덩이를 의미한다.

용추계곡 들어가는 길에 이런 귀한 말씀이 있다.
"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 탐한 재물은 하루 아침의 먼지라오."


2. 옛 장수사 터

다음 들른 곳은 옛 장수사 터.

이마 사라져버린 옛 절의 역사보다는
절 일부를 지키던 일주문(一柱門)의 내력이 더 흥미롭다.
일주문은 말 그대로 기둥을 좌우 하나씩의 기둥으로 세운 문으로서,
속세로부터 부처님의 세계로 드는 첫 관문을 의미한다. 

이 일주문이 특별한 것은 그 기둥과 지붕이 대단히 웅장하다는 데 있다.
당시 이 절의 위세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거대한 통나무(직경이 1.2m)로 된 한 쌍의 기둥이 생긴 모습 그대로 투박하게 세워져 있고, 주춧돌 역시 자연상태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 지역 출신 한 분이 말씀하시길,
둥 하나는 칡이고 다른 하나는 싸리라고 들었다고 한다.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기둥의 하단은 주춧돌의 형성에 맞추어 요철 가공되어 있다.
이러한 맞춤 방식을 '그랭이질'이라 부른다고 학예사가 일러준다. 


3. 연암 물레방아 시원지

연암 박지원의 물레방아 시원지

물레방아는 실학자이신 연암 박지원 선생께서 안의현감으로 재임하던 중에
함양의 안의에 처음으로 보급하였다고 한다.
그 참.. 그럼 그 이전(1792년)에는 조선에 물레방아가 없었다는 말인가?
학예사도 그 점을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여하튼 이 때문에 함양에서는 해마다 물레방아 축제가 열린다고..

박지원 선생의 '호곡장론'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해놓은 글이 있다.
 

4. 광풍루

삼일식당에서 안의에서 유명한 갈비탕(무려 14,000원)을 맛있게 먹고 나오니,
바로 그 식당 옆에 광풍루(光風樓)가 있다.
바로 앞에 큰 내가 있고 그 내에 널려있는 닳고 닳은 크고 작은 몽돌 바위들이 예사롭지 않은 역사가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은 옛모습이 다 사라졌겠지만, 당시에 그 풍광이 대단했을 것이다.


5. 거연정

이제 화림동 계곡으로 갔다.
이 계곡은 가히 정자의 계곡이라 할만하다.
계곡 전반에 암반이 두텁고 넓은데다, 물이 풍부하다.
계곡, 바위, 물이 제공하는 풍광이 워낙 아름답기에
누구라도 정자를 세워 풍류를 즐기고 싶어할 딱 그런 곳이다.
상류의 거연정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정자들을 차곡차곡 답습하는 동선이다.

거연정(居然亭). 엄지 척!
자연에 머무른다는 뜻.
주위의 풍광과 이토록 잘 어우러진 정자를 일찌기 본 적이 없다.

거연정에서 이런 멋진 경치를 즐기며 사나흘 쯤 퍼질러 지내면,
만병이 달아나고,
서너달 운기조식을 하면
신선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6. 군자정


거연정의 바로 아래에 군자정이 있다.
군자(君子)가 머무는 정자라서 그런지,
매우 투박하고 주위의 풍광도 거연정에 비하면 담백하다.


7. 동호정

군자정에서 몇 분 거리에 동호정(東湖亭)이 있다.
동호정은 정자 그 자체도 누각처럼 크고 화려하지만,
그 앞에 있는 엄청난 크기의 자연암반인 차일암이 인상적이었다.
차일암은 수백명이 동시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넓어,
악기를 연주하는 곳, 시를 읆는 곳, 술을 마시는 곳 등이 구분되어 있다.


차일암(遮日巖)은 태양을 가릴 수 있을 정도의 큰 바위라는 뜻

너럭바위 차일암에서 본 동호정

동호정의 다리기둥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져다 사용하였습니다.


동호정에서 내다본 너럭바위.
오랫동안 고요히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저 분.. 수련 중이신듯.



8. 농월정

농월정 가는 길목의 식당들..
대낮인데도 취객들의 노래소리로 너무도 시끄럽다. ㅠㅠ..


자연암반 위에 축조된 농월정.
달을 희롱한다고 하지만, 달보다는 물과 바위를 희롱하는 입지이다.


농월정에서 내려다본 장면들



##

거연정은 외부에서 그 정자를 바라볼 때 그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 자체가 풍광의 핵심 요소로서 역할한다.
그에 반해 동호정과 농월정은 그 정자들에 올라서 주위의 풍광을 즐기기 위한 곳이기에, 내려다보이는 바위와 물이 정말 아릅답다.
남에게 보여주는 멋의 정자와, 외부를 멋진 경치를 즐기기 위한 멋의 정자..
어느 것이든 귀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화림동 물을 따라 많은 정자가 생겨났는가 보다. 


9. 남계서원

남계서원
1주일 전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축하 현수막이 걸려있다.
마침 오마이뉴스에서 사진기자가 우리를 촬영하여 기사가 실렸다.

남계서원은 다른 서원들에 비해 특별한 멋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조가 서원의 대표적인 배치라는 점에서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10. 일두고택

개평마을에 있는 일두고택의 솟을대문

일두(一蠹) 정여창 선생의 고택에 왔다.
일두(一蠹)의 두(蠹)는 좀벌레라는 뜻이다.

<정여창(
, 1450~1504)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로 본관은 경남 하동이나 그의 증조인 정지의가 처가의 고향인 함양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함양사람이 되었다. 자녀 균분 상속제가 지켜지던 당시에는 거주지를 옮길 때 처가나 외가로 옮겨가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하다가 김굉필과 함께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여러 차례 천거되어 벼슬을 내렸지만 매번 사양하다가 성종 21년(1490) 과거에 급제하여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연산군 1년(1495) 안음현감에 임명되어 일을 처리함에 공정하였으므로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498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백욱()이었는데, 그의 아버지와 함께 중국의 사신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를 눈여겨본 중국 사신이 “커서 집을 크게 번창하게 할 것이니 이름을 여창()이라 하라”고 했다고 한다. 과연 그의 학덕은 출중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사에서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5현으로 인정받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사랑채

안채

안채의 툇마루

사랑채 마당가 가산에 있는 노송

가산에서 발견한 청개구리

일두고택 앞 골목길


개평마을에 있는 독특한 북카페. 주말과 휴일에만 문을 연다고..


11. 상림

상림은 신라시대에 최치원 선생께서 함양의 태수로 재임할 때,
치수를 목적으로 조성한 인공림이다.
숲속에는 여러가지 역사 유물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상림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연밭.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


- 끝 -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나는 오랑캐의 바지를 입고자 하오
조무령왕(趙武靈王)의 호복기사(胡服騎射)


혁신에 의해 리더와 팔로워가 구분된다.
(Innovation distinguishes between a leader and a follower.)
_ 스티브 잡스



*
모든 조직은 생존과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혁신을 필요로 하는 때를 만나게 된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성공한 혁신은 그 조직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보장하지만, 그렇지 못한 조직은 도태된다. 그래서 혁신은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사명이며, 리더의 역량이 그 성공 여부를 가른다. 하지만 혁신은 고통스러운 변화이다. 누구도 변화의 고통을 기꺼이 따르려 하지 않기에 그 성공은 언제 어디서나 지난하고 그래서 리더의 역할에 더욱 의존한다.

혁신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리더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통찰력과 리더십이다. 통찰력은 조직에 변화가 필요한 때임을 인식하고 올바른 변화의 방향을 제시한다. 타이밍과 방향이 어긋난 변화는 혁신이 아니라 그저 허망한 몸부림에 불과하다. 적절한 변화의 때와 방향이 정해졌으면 모든 조직원들을 일사불란하게 행동하게 하여야 한다. 이것이 리더십이다. 통찰력과 리더십은 반드시 짝을 이루어야 한다. 리더십 없는 통찰력은 이룸이 없고, 통찰력 없는 리더십은 위태롭다.

*

2300년전에 군사강국을 갈구하여 강력한 혁신을 꿈꾼 군주가 있었다.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무령왕(趙 武靈王, BC 340년 ~ BC 295년)이 그이다. 당시 중국은 전국 7웅(雄)이라 불리는 (진). (초), (연), (제), (한), (위) 및 (조) 일곱 나라가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다. 그 중 조나라는 중원의 북쪽 지역에 위치하여 있어, 북쪽의 흉노와 연나라의 위협에 항상 드러나 있었고, 그외의 방위에서도 진나라와 한나라 등 강대국들과 생존을 위협하는 갈등을 겪고 있었다.
나라의 생존을 위해 강한 군대가 있어야 함을 절실히 인식한 조무령왕은 나라가 변하여야 할 방향을 내심으로 정하고 어느날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강력한 군대의 보호가 없으면 사직은 망할 수밖에 없소. 어찌하면 좋겠소?
무릇 세상에 이름을 높이고자 하면
물려받은 풍속에 누를 끼쳐야할 때가 있는 법이오.
나는 호복(胡服)을 입고자 하오."
(
無彊兵之救, 是亡社稷, 柰何? 夫有高世之名, 必有遺俗之累. 吾欲胡服.
_
司馬遷 史記 趙世家)

 

*

호복(胡服)은 '오랑캐의 바지'이다.
그런데 이 '오랑캐 바지'(호복)를 입는 것
이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당시 중국 남성의 복식은 의상(衣裳)이었다. 의상은 저고리(衣)와 치마(裳)를 가리킨다. 남성의 치마 저고리 복식은 중원 문화의 자존심인 반면, 오랑캐 바지는 야만의 상징이었다.

중원의 나라들에서는 전쟁의 기본 단위가 병차(兵車, 병거)로 이루어져 있었다. 병차는 영화 '벤허'에서 볼 수 있던 전차와 유사하다. 네 필의 말이 끄는 병차에는 마부에 해당하는 어자(御者), 활을 든 차좌(車左) 및 창을 든 차우(車右)로 이루어진 3명의 전투조가 탑승한다. 그리고 병차 한 대에는 갑옷입은 무사인 갑사, 보병, 치중 등 약 30명이 뒤따르며, 이 부대 단위를 1승(乘)이라 불렀다. 천승지국, 만승지국은 병차의 대수가 1천대 혹은 1만대에 이름을 가리키니까, 그로부터 그 시대 제후국들의 병력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이러한 중원의 병차 시스템은 위엄과 품위를 앞세우고 온정과 의리가 남아있던 수백년 간의 춘추시대에는 별 불편없이 지속되어 왔었지만, 전쟁이 잦아지고 침략과 살육이 더 치열해진 전국시대에 와서는 실전에서 그 비효율성이 큰 취약점들이 드러났다. 바퀴 달린 수레인 병차는 평탄하고 길이 잘 정비된 평지에서의 전투에 최적화된 것이기에, 산악 등의 비평지전에서는 기동성을 발휘할 수 없었고, 말과 병차를 유지관리하는 데 많은 비용과 인력이 소요되었다. 특히 개별적으로 말을 타고 달리며 순식간에 치고 빠지는 북방의 적족이나 융족들과의 전투에서는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병차(兵車)의 구성>


개별 전사들이 각자의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북방 오랭캐의 전투방식에는 중원의 치마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치마가 아닌 바지 즉 호복(胡服)을 입었다. 호복을 입고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것을 호복기사(胡服騎射)라 한다. 호복기사의 모습은 고구려 무용총의 벽화 수렵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호복기사
(胡服騎射)는 그 기동성과 전투력에 있어서 병차에 비할 바 없이 탁월하였고, 또 경제적이었다. 중원 북방의 나라들은 북방 오랑캐의 호복기사에 전투가 있을 때마다 번번히 애를 먹었다.

이에 조무령왕은 강한 군사력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는 중원 문화의 상징인 병차를 버리고 오랑캐의 습속인 호복기사(胡服騎射)를 채용하는 것이 불가피함을 통찰한 것이다. 그래서 신하들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나는 호복기사(胡服騎射)를
백성에게 가르치고자 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틀림없이 과인에 대해 무어라 뒷말이 많을 것입니다.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今吾將胡服騎射以敎百姓而世必議寡人柰何?)



*
호복기사(胡服騎射)에 대한 조정의 반발은 당연히 거세었다.
왕은 나라의 군사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변화라고 여겨 복식과 전투방식을 혁신하고자 하였지만, 소수의 몇 사람을 제외한 대다수의 신하들은 천박한 오랑캐 습속을 받아들일 수 없고 자랑스런 전통 문화를 고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강력히 반대하였고, 심지어는 칭병하며 조정에 나오지를 않는 신하들도 있었다. 

하지만 조무령왕은 신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조무령왕이 신하들을 설득하는 데 사용한 언어들의 예는 아래와 같다. 이들 말을 보면, 혁신 방향에 대한 깊은 통찰과 강력한 추진 및 설득 의지를 절감할 수 있다. 

세상에 높은 공을 이룬 사람은
물려받은 풍속에 누를 끼치는 짐을 져야 하며
홀로 지혜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은
변화를 싫어하는 백성들의 원망을 감내해야 합니다.
(有高世之功者 負遺俗之累 有獨智之慮者 任驁民之怨.)

지극한 덕을 논하는 사람은 세속과 화합하지 못하고,
큰 공을 이루는 자는 여러 사람과 도모하지 않습니다.
(論至德者 不和於俗 成大功者 不謀於衆)

어리석은 자는 일이 이루어져도 제대로 모르지만
지혜로운 자는 조짐이 나타나기도 전에 그것을 봅니다.
(愚者闇成事 智者覩未形)

나라 다스림의 원칙은 인민을 이롭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정무 처리의 원칙은 명령이 이행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덕을 밝히고자 할 때는
먼저 아랫사람부터 논의하여야 하고,
정책을 실행하고자 할 때는
먼저 윗사람부터 믿음을 갖게 해야 합니다.
(制國有常 利民爲本 從政有經 令行爲上 明德先論於賤 而行政先信於貴)

무릇 옷이란 것은 입기에 편하기 위한 것이고,
예라는 것은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인들께서는
지역에 따라 그 편의에 따르고,
일에 따라 예를 제정함으로써,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나라는 부유하게 한 것입니다.
(夫服者 所以便用也 禮者 所以便事也.
聖人觀鄕而順宜, 因事而制禮 所以利其民而厚其國也) 

지금 숙부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풍속 그 자체에 관한 것입니다만
제가 말하는 것은 풍속을 만드는 이치에 대한 것입니다.
(今叔之所言者俗也吾所言者所以制俗也)

현명함이라는 것은
변화와 더불어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賢者與變俱) 

글로 말을 몰고자 하는 자는 말의 성정을 다 알지 못하며,
옛것으로 지금을 규제하려는 것은 일의 변화를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
(以書御者不尽馬之情, 以古制今者不達事之変)

옛법을 좇는 공만으로는 세상을 뛰어넘을 수 없고
옛날 가르침만을 본받아서는 현재를 규제하기에 부족하오.
(循法之功 不足以高世 法古之学 不足以制今)


*
결국 조무령왕의 설득은 성공하였다. 
반대하던 신하들을 모두 적극적인 동참자로 만들었다. 조나라의 군제는 호복기사 체제로 개편되었고, 그 결과 왕이 원하던 강력한 국가가 구축되게 되었다.
그리고 호복기사는 조나라에 이어 중원의 다른 나라들도 속속 채용하여 더이상 오랑캐나 조나라만의 문화가 아닌 중원 전체의 문화로 정착되게 되었으며, 고구려에 까지 전파되어 무용총의 수렵도에 그 증거를 남기고 있다.

이러한 호복기사 혁신의 성공은 전적으로 조무령왕의 탁월한 통찰력과 리더십에 기인한다. 조무령왕이 혁신을 이룬 이 고사에서 깨달을 수 있는 가르침 몇 가지 정리해보도록 하자.

첫째, 그는 혁신의 의미를 통찰하고 있었다.
혁신은 기존의 틀을 파괴하는 것이다. 기존의 틀을 파괴하는 수단은 내부에서 일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배워오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외부의 문화는 적들의 것이었다.
조무령왕은 혁신의 방향을 적으로부터 배워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도 중원 문화가 천대하던 비천한 오랑캐의 습속이었다.
중원 문화인의 자존심 유지와 군사강국이라는 당면의 비전은 양랍할 수 없었다. 그 둘 사이에서 무척이나 고뇌하였을 것이다. 결국 그는 '예(禮)'와 같은 알량한 명분을 과감히 배제하고 국가의 생존을 위한 실리를 채택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릇 옷이란 것은 입기에 편하기 위한 것이고예라는 것은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혁신의 성공은 기존의 가치를 철저히 무너뜨리는 자기 부정의 탈각을 요구한다. 그래서 그는 "옛을 좇는 공만으로는 세상을 뛰어넘을 수 없고, 옛날 가르침만을 본받아서는 현재를 규제하기에 부족하오."라고도 말하였다.

둘째, 그는 저항을 예측하고 감내하였다.
많은 리더들은 자신이 제안한 혁신의 방향을 모든 조직원이 박수치며 칭송하고 기꺼이 따를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그런 착각은 대체로 실망과 좌절, 분노로 귀결되고 혁신의 노력은 포기의 거품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조무령왕은 강력한 저항이 실재할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혁신은 전통을 불가피하게 파괴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그것을 수호하고자하는 노력은 혁신에 대한 저항으로 맞서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높은 공을 이룬 사람은 물려받은 풍속에 누를 끼치는 짐을 져야 하며, 홀로 지혜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은 변화를 싫어하는 백성들의 원망을 감내해야 합니다."

셋째, 그는 끈질기면서도 효율적으로 설득하였다.
그는 결코 강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논리로서 혁신의 필요를 설파하였다. 강력한 절대권력을 가진 봉건 군주임에도 자신의 혁신 방향에 무조건 따르라고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끈질긴 인내심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논리적으로 이해시켜 끝내 모두의 생각을 바꾸어놓았다. 그들 모두에게 진정한 갈증을 느끼게 할 수 없다면, 그들을 아무리 냇가에 끌어다놓아도 물을 마시게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효율적인 설득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덕을 베풀 때에는 아랫사람부터 챙겨야 하지만, 호복기사의 채택과 같은 정책의 실행은 고위 신하들부터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덕을 밝히고자 할 때는 먼저 아랫사람부터 논의하여야 하고정책을 실행하고자 할 때는 먼저 윗사람부터 믿음을 갖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_ 끝_


<양이 이끄는 사자의 무리보다
사자가 이끄는 양떼가 더 강하다>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 2014년 오늘 페북에 올렸던 글 *


달리 공포의 중2가 아니다.
이 녀석들이 무서워서 북이 도발을 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더니..

중2 아들놈이 어제 저녁 제 엄마와 머리를 깍고 들어왔다.
좀 시원하게 깍고 왔는데.. 내 아들이지만 훤하게 잘 생겼다.
소지섭이는 저리 가라다.
그 동안 온통 덥수룩하니 덮은데다 이마까지 가리고 다니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얼굴을 좀 드러내 놓으니 속이 시원하다.

그런데 이 녀석은 영 불만인 모양이다. 볼멘 얼굴이 불퉁하다.
지 나름대로 화장실에서 어떻게 손을 보고(?) 왔는 데도 영 아닌가 보다.
지 엄마에게 푸념을 해댄다.
오늘 가지 말자고 했더니.. 엄마가 깔끔하게 해달라고 주문을 해서 그런다는 둥..
엄마는 엄마대로 억울해서 소리 높여 대꾸를 하고..
바깥의 거실이 한참 동안 시끄럽다.

나이에 비해 제법 속이 올찬 놈이라 이런 일로 신경쓰게 한 적이 별로 없는데..
오늘따라 유독 생억지를 부려댄다.
못들은 척 하고는 있었지만 속이 슬슬 끓어오른다.
내 급한 성질에 당장이라도 나가서 호통을 쳐 찍소리 못하게 눌러놓고 싶다.
하지만 들은 이야기가 있어 꾹 참는다.
저 때는 골프공과 같아서 좀 힘이 들어가면 악성 슬라이스가 되어 OB가 나버린다는..

좀 조용해지고 나서 아들에게 가서 말했다.

.. 살다보면 항상 문제를 만나게 된다.
모든 문제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해결할 수 있는 일과 해결할 수 없는 일.
해결할 수 있는 일은 해결하면 되니 이제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좀 마음은 편치 않겠지만 어쩌겠냐.아무리 화를 내고 용을 써도 돌이킬 수 없는 일에 심력을 쏟는 건 어리석지 않냐?
그게 지혜롭게 사는 방법이다. ..

이렇게 말을 해도 대답은 여전히 삐딱하고 퉁명스럽다.
좀더 확실히 알아듣게 뭐라 좀 물리적인 가르침을 더 줘야 하나 짧은 시간 고민하다.. 이 녀석의 반응이 두려워서 참고 물러난다.

10여분 내 할 일 하고 있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옆에 와서 헤헤거리고 부비고 장난을 친다.
짜슥이.. 에궁.. 참..

참길 잘했다.또 한 번 배운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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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제사의 이관과 증조할아버지의 필갑

**
2016년(병신년)에 모든 제사를 서울로 이관했다. 이관을 고하는 절차는 설날 차례를 지내면서 간략히 그 취지를 언급한 축문을 독축하는 것으로 이행되었다. 그렇게 해서 장남으로써의 유기된 직무를 드디어 넘겨가져가게 된 것이다. 그동안 근 20년 가까이를 동생 부부가 부모님을 모시면서 제사를 맡아왔다. 제수씨의 수고를 더는 만큼 우리 부부의 심적 부담도 많이 가벼워졌다. 지차 입장에서 어른들 수발하며 4대 봉제사에 정성을 다하며 사는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제수씨의 후덕한 마음 씀씀이와 그동안의 노고는 내 평생의 고마운 마음의 빚이 될 것이다. 

제사를 이관하고 나니 매 기일마다 아버지는 서울 나들이를 하셔야 했다. 동생 가족은 아무래도 업이 있으니 부득이 윗대 제사는 참례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도 아버지는 거의 빠지지 않고 혼자서 올라오신다. 

첫 해에는 매 제사날이 오면 아침 일찍 그 제사의 어른을 모신 산소에 들렀다 오셨다. 여쭈어보니 제사가 서울로 옮겼졌음을 산소에서 다시 고하고, 조상님들께서 길을 잃지 않도록 '저를 따라 오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린다고 하신다. 보통 정성스런 마음이 아니다.

**
설 다음 날 집에 있던 제사 용품들을 모두 챙겨서 서울로 옮겼다. 그 중에는 대를 이어 내려온 낡은 궤짝도 함께 가져왔다. 그 궤짝 안에는 별 게 다 들어 있었다. 대부분은 내 한문 실력으로는 읽어내기가 어렵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증조부님이 쓰시던 필갑이었다.
필갑의 뒷면을 보니 임인년에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임인년은 1902년과 1962년이 해당하는데, 일제 때의 호적등본도 들어있는 걸 보면, 적어도 1902년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1902년이라면 무려 117년이나 된 것이다.

그 속에는 소화7년 작은 아버지의 국민학교 졸업장도 있고,  소화11년에 할아버지가 매입한 선산의 매도증서도 있다. 
그리고 나의 대학 1학년 때 성적표도 있다. 행정우편으로 보내온 것을 아버지가 귀한 서류라고 생각하고 넣어두신 모양이다. 성적 내용은 내가 필기로 기입한 것이다. 세월은 이토록 흘렀지만 부끄러운 성적은 조금도 오르지 않고 그대로 있다..

가락국기 필사본도 들어 있다. 신유년이라 표시된 걸 보니.. 1921년이나 1861년의 것인 듯하다.

틈이 날 때마다 필갑 속의 자료들을 하나씩 해독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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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가지 의미있는 책자가 들어있다.

혼례 서간문 서식, 상례나 제사의 서식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 책자는 내가 어릴 때부터 축문을 쓸 때 항상 참고해왔는데, 이번에 내용을 전체적으로 둘러보니 약 100페이지에 이르는 매우 많은 내용이 들어 있다. 대부분 지금은 쓰일 일이 없는 내용들이지만, 나름 격식을 차려 서신을 써야 할 때는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책 내용 중에는 구황장생법도 들어있다.
어려웠던 시절에 식량을 부족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의 지혜를 담은 내용이다. 찬찬히 공부해볼만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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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허성원 변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