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9.07.15 커피찌꺼기 재활용
  2. 2019.07.15 존재와 행위
  3. 2019.07.14 함양 역사기행
  4. 2019.07.14 박경리의 일본산고(日本散考) 중에서
  5. 2019.07.12 Robot Cafe _ 로봇 커피숍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존재와 행위


이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고, 참과 거짓 혹은 평등과 차별의 문제도 아니다.
'존재'와 '행위'의 문제이다.
그리고 공감능력이나 상상력이 있는가 혹은 없는가의 문제이다.

#장면1
어제 저녁 아들과 동네 팥빙수 가게에서 팥빙수를 먹었다.
열심히 일하는 가게 주인을 얼핏 보니 매우 예쁘장하게 생겼다. 하지만 분명히 남자다. 성별을 쉽게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제법 눈에 띄게 치렁거리는 귀걸이에다 상당히 공들여서 화장도 한 듯하다.
가게 주인의 꼴(?)에 속이 좀 불편하다. 그래서 내가 아들에게 뭐라 한 마디를 했는데, 나의 불편한 속내가 그 말에 뭍어나왔나 보다.
아들이 상당히 강력하게 지적을 한다. 자유로운 자기 표현이니까, 누구도 그 자유를 가지고 뭐라 할 수 없다는 취지의 따끔한 훈시(?)이다. 나도 질 수가 없다.
"야 임마~ 아무리 자기 표현이라고 해도그렇지, 주변 사람들의 평범하고 건강한 정서를 심히 불편하게 하는 것까지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다 용서된다고 할 수 없지. 짜식아~"
"불편하면 안 보면 되는 겁니다. 그걸 굳이 보고 느끼고 평가하고 지적하는 게 옳지 않은 거예요."
그러다 옛날 골프장 사우나에서 온몸에 문신을 한 사람이 탕으로 들어올 때 목욕탕의 모든 사람이 탕에서 모두 나가버린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표현이 모두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모범 사례로 제시했다.
그럼에도 아들은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계속 주장하며 뻗댔다.
아무래도 내가 그놈 빡센 논리에 적잖이 밀렸던 것 같았지만, 더 논쟁을 끄는 것은 체면 유지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 쓴 입맛을 다시며 중단했다.

#장면2
오늘 아침에 아들과 함께 출근했다.
방학 기간 동안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기에, 내가 서울에 있는 동안에는 함께 출근을 한다.
월요일 아침 러시아워라서 지하철이 무척 붐볐다. 한 대를 보내고 다음 차를 탔다. 사람들 틈에 끼여서 잠깐 몸의 자리를 잡았는데, 묘한 냄새가 난다. 내 바로 앞에 비대한 체구의 서양 여성이 있다. 땀을 비오듯이 흘린다. 그녀의 목덜미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티셔츠에는 군데군데 젖은 자국이 드러난다. 그건 그녀의 체취였던 것이다. 백인들의 체취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직접 느낄 기회는 없었는데.. 이렇게 움쩍할 수 없이 밀착해서 제대로 경험하기는 처음이다. 고통스럽다. 옆으로 좀 피했더니, 그 빈틈으로 밀려들어와 더 가까워진다.
옆에 있는 아들을 보았다. 나보다 더 견디기 힘든 모양이다.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거나 하늘을 보기도 하고, 그러다 나를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다행히 이 지하철을 타는 시간은 15분 정도에 불과하다.

#장면3
환승을 위해 걸어가면서 그 상황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아들은 사람에 대해 그토록 살의에 가까운 증오심이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고, 그 상황의 끔찍한 고통을 말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이런 시간에 지하철을 타면 안된다고 비난한다.
내가 말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의도해서 그런 게 아니지 않느냐. 그 사람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대중 교통을 이용하여 다닐 권리가 있고, 어딘가로 출근하여야 한다면 그걸 말릴 수 없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그 사람은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겪을 불편이나 고통을 제대로 모를 것이다.
남의 고통에 대해,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고, 동시에 그것을 의식하지도 않았다면, 그 사람을 어찌 비난할 수 있는가'
아들은 다행히 쉽게 동감한다고 말해준다.

#장면4
지하철을 내려 사무실로 가면서, 오늘 아침의 경험을 어제 저녁의 '자기 표현의 자유'와 함께 논의하면서 대충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 '행위'는 비난받을 수 있다. 행위는 행위자의 자유 의지에 기초한 것이기에, 적극적으로 타인의 신체나 정서를 해치는 행위는 용서되기 어렵다. 그것이 설사 자신 스스로에 대한 자기 표현이라 하더라도.
- '존재'는 어떤 경우에도 비난 받아서는 안된다. 모든 인간은 그 존재, 피부색, 모습, 출신, 종교 등의 이유로 피해를 받아서는 안된다. 그 존재 등이 비록 다른 인간들에게 호불호나 불편의 이유는 될 수 있을지라도, 박해나 배척의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 이유로 인해 보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 이 문제를 생각하는 매우 좋은 잣대는 공감 상상력이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나 자신 혹은 내 자식이나 가족일 때를 상상해보면 된다.
상대방의 입장을 공감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이 느낀 감정에 따라 상대를 재단하고 평가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복잡한 지하철 내에서 불편한 체취를 발산하는 사람은 제거대상인 악이다.
하지만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상상해볼 수 있다면 전혀 다른 생각으로 귀결될 수 있다. 생각해보자. 만약 내 피붙이 중 누군가가 복잡한 지하철 내에서 체취로 주변 사람들을 심히 불편하게 하는 체질이라면,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아야 할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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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함양 역사기행


**
함양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아내가 다니는 창원대 박물관대학에서 함양으로 역사탐방을 간다기에 따라 나섰다. 생면 부지의 사람들 사이에 끼여간다는 게 좀 뻘쭘하긴 했지만, 약 15년 전에 가봤던 함양의 아름다운 풍광이 떠올라 거기에 어떤 역사적인 배움꺼리가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간만에 아내와 바람쐬러 가고 싶기도 하여 따라 가겠다고 했다. 

정말 귀한 경험을 하였다. 평소 가져볼 수 없는 멋진 시간을 즐기고 왔다. 함께 간 그 분들은 평소 자주 경험해서인지 비교적 덤덤하게 다니셨는데, 나 혼자서만 신이 나서 이리저리 나다니며 사진을 찍어대고 한마디 한마디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옛날 경상도의 어른들은 먼 산골오지의 생활을 예로 들 때 '저 해명산청에 가면'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 '해명산청'이 지리산 자락의 함양과 산청이라는 것을 다 자라서 알게 되었다. 약 15년 전 인산죽염 김인세 대표의 초대로 지리산 높은 곳에 자리한 인산죽염 연수원을 방문했을 때, 마침 함양의 산길 도로를 따라 벚꽃이 너무나도 화려하게 피어있어 산골 꽃마을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던 적이 있다. 그곳에 무슨 역사가 있을까.

창원대 박물관의 학예사가 자료를 꼼꼼히 많이도 준비해왔다. 근데 이제 눈이 가버려서 작은 글씨의 글이 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료는 옆으로 제쳐두고 학예사의 설명을 귀로 듣고 눈으로 들어오는 실물 정보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 번 기행의 타이틀이 흥미롭다. 
"함양을 弄하다"
학예사가 설명한다. 농(弄)은 '희롱할 농' 자로 불리지만, 구슬 옥(玉)과 받들 공(廾)으로 이루어져, 정성을 들여 솜씨있게 다룬다는 의미로서, 농현(弄絃), 농월(弄月) 등으로 활용된다고.


**
출발은 1019년 7월 13일 아침 8시반. 창원대.

기행 동선은 대충 다음과 같다.
1. 용추폭포 -> 2. 옛 장수사 터 -> 3. 연암 박지원의 물레방아 시원지 -> 4. 광풍루 -> 5. 거연정 -> 6. 군자정 -> 7. 동호정 -> 8. 농월정 -> 9. 남계서원 -> 10. 일두고택 -> 11. 상림.

하루에 모두 소화하기에 만만치 않은 스케줄이있지만,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어하는 학예사의 열정에 고마움의 탄사가 절로 나왔다.

**
이런 여행을 다녀보면 일정 중에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많이 찍어두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 잘 남아있지 않다. 기억이 따끈따끈하게 남아있을 때 어떻게 해서든 대충이라도 정리를 해두면 언젠가는 자료로서 요긴하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항상 주장하는 것!
"기억은 사라지고 기록은 남는다."

그럼 이제부터 사진을 보면서 기억을 되새겨본다. 


1. 용추폭포


첫 방문지 용추(龍湫)폭포. 시원한 물소리가 참 좋다.
여기에도 어느 폭포에나 가면 들을 수 있는 가련한 이무기의 전설이 있다.
108일의 금식 수련 기간을 단 하루 착오하여 용이 되지 못하고 추락한...
어떤 분이 그래서 용이 추락하였다고 '용추'라고 하는가 보다라고 말씀하신다. 찾아보니 용추의 추(湫)는 웅덩이를 의미한다.

용추계곡 들어가는 길에 이런 귀한 말씀이 있다.
"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 탐한 재물은 하루 아침의 먼지라오."


2. 옛 장수사 터

다음 들른 곳은 옛 장수사 터.

이마 사라져버린 옛 절의 역사보다는
절 일부를 지키던 일주문(一柱門)의 내력이 더 흥미롭다.
일주문은 말 그대로 기둥을 좌우 하나씩의 기둥으로 세운 문으로서,
속세로부터 부처님의 세계로 드는 첫 관문을 의미한다. 

이 일주문이 특별한 것은 그 기둥과 지붕이 대단히 웅장하다는 데 있다.
당시 이 절의 위세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거대한 통나무(직경이 1.2m)로 된 한 쌍의 기둥이 생긴 모습 그대로 투박하게 세워져 있고, 주춧돌 역시 자연상태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 지역 출신 한 분이 말씀하시길,
둥 하나는 칡이고 다른 하나는 싸리라고 들었다고 한다.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기둥의 하단은 주춧돌의 형성에 맞추어 요철 가공되어 있다.
이러한 맞춤 방식을 '그랭이질'이라 부른다고 학예사가 일러준다. 


3. 연암 물레방아 시원지

연암 박지원의 물레방아 시원지

물레방아는 실학자이신 연암 박지원 선생께서 안의현감으로 재임하던 중에
함양의 안의에 처음으로 보급하였다고 한다.
그 참.. 그럼 그 이전(1792년)에는 조선에 물레방아가 없었다는 말인가?
학예사도 그 점을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여하튼 이 때문에 함양에서는 해마다 물레방아 축제가 열린다고..

박지원 선생의 '호곡장론'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해놓은 글이 있다.
 

4. 광풍루

삼일식당에서 안의에서 유명한 갈비탕(무려 14,000원)을 맛있게 먹고 나오니,
바로 그 식당 옆에 광풍루(光風樓)가 있다.
바로 앞에 큰 내가 있고 그 내에 널려있는 닳고 닳은 크고 작은 몽돌 바위들이 예사롭지 않은 역사가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은 옛모습이 다 사라졌겠지만, 당시에 그 풍광이 대단했을 것이다.


5. 거연정

이제 화림동 계곡으로 갔다.
이 계곡은 가히 정자의 계곡이라 할만하다.
계곡 전반에 암반이 두텁고 넓은데다, 물이 풍부하다.
계곡, 바위, 물이 제공하는 풍광이 워낙 아름답기에
누구라도 정자를 세워 풍류를 즐기고 싶어할 딱 그런 곳이다.
상류의 거연정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정자들을 차곡차곡 답습하는 동선이다.

거연정(居然亭). 엄지 척!
자연에 머무른다는 뜻.
주위의 풍광과 이토록 잘 어우러진 정자를 일찌기 본 적이 없다.

거연정에서 이런 멋진 경치를 즐기며 사나흘 쯤 퍼질러 지내면,
만병이 달아나고,
서너달 운기조식을 하면
신선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6. 군자정


거연정의 바로 아래에 군자정이 있다.
군자(君子)가 머무는 정자라서 그런지,
매우 투박하고 주위의 풍광도 거연정에 비하면 담백하다.


7. 동호정

군자정에서 몇 분 거리에 동호정(東湖亭)이 있다.
동호정은 정자 그 자체도 누각처럼 크고 화려하지만,
그 앞에 있는 엄청난 크기의 자연암반인 차일암이 인상적이었다.
차일암은 수백명이 동시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넓어,
악기를 연주하는 곳, 시를 읆는 곳, 술을 마시는 곳 등이 구분되어 있다.


차일암(遮日巖)은 태양을 가릴 수 있을 정도의 큰 바위라는 뜻

너럭바위 차일암에서 본 동호정

동호정의 다리기둥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져다 사용하였습니다.


동호정에서 내다본 너럭바위.
오랫동안 고요히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저 분.. 수련 중이신듯.



8. 농월정

농월정 가는 길목의 식당들..
대낮인데도 취객들의 노래소리로 너무도 시끄럽다. ㅠㅠ..


자연암반 위에 축조된 농월정.
달을 희롱한다고 하지만, 달보다는 물과 바위를 희롱하는 입지이다.


농월정에서 내려다본 장면들



##

거연정은 외부에서 그 정자를 바라볼 때 그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 자체가 풍광의 핵심 요소로서 역할한다.
그에 반해 동호정과 농월정은 그 정자들에 올라서 주위의 풍광을 즐기기 위한 곳이기에, 내려다보이는 바위와 물이 정말 아릅답다.
남에게 보여주는 멋의 정자와, 외부를 멋진 경치를 즐기기 위한 멋의 정자..
어느 것이든 귀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화림동 물을 따라 많은 정자가 생겨났는가 보다. 


9. 남계서원

남계서원
1주일 전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축하 현수막이 걸려있다.
마침 오마이뉴스에서 사진기자가 우리를 촬영하여 기사가 실렸다.

남계서원은 다른 서원들에 비해 특별한 멋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조가 서원의 대표적인 배치라는 점에서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10. 일두고택

개평마을에 있는 일두고택의 솟을대문

일두(一蠹) 정여창 선생의 고택에 왔다.
일두(一蠹)의 두(蠹)는 좀벌레라는 뜻이다.

<정여창(
, 1450~1504)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로 본관은 경남 하동이나 그의 증조인 정지의가 처가의 고향인 함양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함양사람이 되었다. 자녀 균분 상속제가 지켜지던 당시에는 거주지를 옮길 때 처가나 외가로 옮겨가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하다가 김굉필과 함께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여러 차례 천거되어 벼슬을 내렸지만 매번 사양하다가 성종 21년(1490) 과거에 급제하여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연산군 1년(1495) 안음현감에 임명되어 일을 처리함에 공정하였으므로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498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백욱()이었는데, 그의 아버지와 함께 중국의 사신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를 눈여겨본 중국 사신이 “커서 집을 크게 번창하게 할 것이니 이름을 여창()이라 하라”고 했다고 한다. 과연 그의 학덕은 출중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사에서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5현으로 인정받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사랑채

안채

안채의 툇마루

사랑채 마당가 가산에 있는 노송

가산에서 발견한 청개구리

일두고택 앞 골목길


개평마을에 있는 독특한 북카페. 주말과 휴일에만 문을 연다고..


11. 상림

상림은 신라시대에 최치원 선생께서 함양의 태수로 재임할 때,
치수를 목적으로 조성한 인공림이다.
숲속에는 여러가지 역사 유물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상림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연밭.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


- 끝 -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學而/읽은책2019.07.14 13:06

박경리의 '일본산고(日本散考)' 중에서


오늘 아침에 박경리 선생(음력 1926년 10월 28일 - 2008년 5월 5일)의 일본산고(日本散考)를 전자책으로 사서 읽어보고 있다. 이 책은 선생이 돌아가신 후 일본에 관한 미발표 원고들을 모아 2013년에 발간된 것이다.

이 책의 제3부에서는, 일본의 우파 역사학자인 '다나카 아키라'가 1990년 8.15에 즈음하여 발표한 "한국인의 '통속민족주의'에 실망합니다"라는 글이 먼저 실려있다. 이 글은 '통속민주주의의 성행', '타자에게 얽메이는 한국인', '반일도 대중화 시대로', '사죄는 마음의 문제' 등의 소제목으로 한국인의 반일감정을 비판하였다. 다나카의 글에 대한 박경리 선생의 반박이 이어진다. 선생은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충고할 자격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실랄하게 반박하였다. 

그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여 옮겨본다.
(이 분의 글 어조는 베껴쓰는 훈련을 해보기에 참 좋은 대상이라, 캡처한 글 부분을 일부러 타이핑하여 입력해보았다.) 

~~~~~~~~~~~~~~~~~~~~~~~~~

- 어부는 어부의 말로 감정을 표현하고, 농부는 농부의 말로, 제각기 환걍과 지적 수준에 따라 자기 견해를 표명한다.
하기는 우리 민족 전부가 겸손하고 고상하고 객관적이고 했으면 오죽 좋을까마는 그렇지 못하다 해서 함구령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은 학자의 독점물이 아니며 사람마다, 너 나 할 것 없이 역사에 동참해온 것만큼 알 권리, 말할 권리는 있다.
설령 일부 지각없는 사람들이 우쭐해서 (일본에 대해) 과잉 표현을 좀 했다 하자. 그들의 천진한 자랑 때문에 일본의 땅 한 치 손실을 보았는가, 금화(金貨) 한 닢이 없어졌는가, 왜 그렇게 못 견뎌 할까. 그 같은 자랑조차 피해로 받아들이는 그들이고 보면 우리 한국의 천문학적 물심양면의 피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안이 벙벙해진다.



- 다소 GNP가 높아졌다 해서 벼락부자의 천박한 속성을 드러내는 행위라든가, 자랑스러움을 간직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가장 찬란한 올림픽을 치렀다는 우월감 따위는 깊이 경계해야 하리라 생각했다.
신(神)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한 고정관념 때문에 유대족은 그 우월감, 배타성으로 하여 오랜 세월 타민족으로부터 소외되고 박해받았고, 게르만 제일주의 나치스는 류 최대의 범죄를 남기고 붕괴했으며, 신국(神國)으로 망상한 일본 역시 최초의 원자탄 세례를 받았다.
자비(自卑)하는 것이 비천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월감의 과시도 비천한 것이며 해악적(害惡的) 요소인 것이다.
간혹 가다가 듣기도 하고 지면에서 보기도 하는 일등국민(一等國民)이라는 말은 본래 서구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시작된 일본의 유치한 용어였었다. 나는 우리 국민들로부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역겨워 견딜 수 없었다. 특히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일등국민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적에 나랏일이 걱정스럽기도 했었다.


거칠 것 없이 남의 팔다리 잘라놓고 뼈 마디마디 다 분질러놓고 제 자신의 새끼손가락에서 피 한 방울 흐르는 것을 보는 순간 새파랗게 질리면서 “아파! 아파!” 하고 울부짖는 형국이다. 맙소사, 이런 정도를 못 견디어 하는 증상의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생각건대, “한
시절 전만 해도 조선인은 우리 앞에 우마(牛馬)나 다름없는 존재 아니었나. 이제 와서 제법 사람 노릇 한다. 도저히 보아줄 수 없군.” 그런 불쾌감도 있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에게서 문화를 조금씩 빌려 갔었던 무지하고 가난했던 왕사(往事, 지난일)로 하여 사무쳐 있던 열등감 탓은 아닐까. 한국의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신이 나서 발 벗고 나서서 떠들어대지만 좋은 것에 대해서는, 특히 문화 면에서는 애써 못 본 척 냉담하고 기분 나빠하고 깔아뭉개려 하는 일본의 심사는 어제 그제의 일이 아니었다. 그 집요함을 도처에서, 사사건건 우리는 보아왔다.


“지각 있는 사람은 함부로 그런 말 하지 않았다”는 말을 보자. 자가당착도 이 정도면…… 미안한 얘기지만 그가 팔푼이가 아니라면 그는 우리를 팔푼이로 보았는가. 이보시오, 지각이 있어서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았다고요? 함부로 말을 했다면 목이 남아 있었을까? 하기는 우리 민족 전부가 지각이 있었지. 살아남기 위하여. 지금은 총독도 없고 말단 주재소의 순사도 없다. 우리를 겨누는 총칼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가. 어째서 일본을 성토하면 안 되는가.


- 나는 젊은 사람에게 더러 충고를 한다.
일본인에게는 예(禮)를 차리지 말라. 아첨하는 약자로 오해받기 쉽고 그러면 밟아버리려 든다. 일본인에게는 곰배상을 차리지 말라. 그들에게는 곰배상이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상대의 성의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힘을 상차림에서 저울질한다.” 
(* 곰배상 : 상다리 부러지게 차린 접대상)



- 몇 해 전의 일이다. 일본의 어느 잡지사 편집장이 내 집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을 기억한다.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 일본이 이웃에 폐를 끼치는 한 우리는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피해를 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것이며 민족주의도 필요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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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허성원 변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