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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소구라 변리사의 지독지정(舐犢之情)

[소구라의 소언(搔言)]002 눈높이를 맞추라

by 허성원 변리사 2022. 8. 5.

[소구라의 소언(搔言)]002

(* 우리 업무의 현장 이야기를 써보기로 한다. 어제 하나 올려봤더니 나름 재미있다. 차제에 이 주제로 시리즈글을 써본다. 원로 변리사인 소구라 선생과 천방지축 초보 변리사인 허소리 사이에 오가는 가상의 대화편으로 엮어보겠다. 가상이긴 하지만, 매일 벌어지는 실제 상황에 기초한 것이다. 제목은 소구라소언(搔言) 즉 '소구라 선생의 긁는 말'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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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소리 : 소구라 선생님. 어제 상담했던 K사의 제품에 대해 기술 내용을 검토하고, 고객에게 보내드릴 브리프를 작성했습니다. 어제 완성된 기계를 가지고 와서 설명을 해주셨는데, 몇 가지 새로운 기술적인 특징들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한두 건으로는 커버할 수 없을 것 같아 공정에 따라 4건 정도로 나누어 출원해야겠다는 의견으로 정리했습니다.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편다.)

- 소구라 : 공정에 따라 나누었다.. 재료의 흐름을 따라가며 기술 카테고리를 구획하여 출원대상을 정했군. 출원 대상 기술의 핵심 포인트가 깔끔히 정리됐네. 수고했네. 권리 확보의 전략적인 면은 따로 이야기 나누기로 하고.. 근데 허변, 이 브리프는 말이야. '잘 쓴 나쁜 보고서'인 것으로 보이네.

- 허소리 : (당황하며) 네? '잘~ 쓴~ 나쁜 보고서'라구요? 무슨 말씀이신지.. 고객에게 알려드려야 할 말을 최대한 빠짐없이 잘 기재했다고 생각했는데.

- 소구라 : 허변. 병원에서 의사의 처방전 본적이 있지? 전문영어를 영어로 마구 흘려 써놓아 환자들은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볼 수 없는 그 낙서 쪽지같은 것 말일세. 허변의 브리프에서 그 고약한 흘림체로 작성된 처방전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는가.

- 허소리 : (경악하며) 네?

- 소구라 : 물론 허변의 브리프는.. 처방전에 비할 수야 없지. 너무도 명료하고 친절한 글이지. 특히 우리 같은 변리사들에게는 말일세. 하지만 생각해보게. 고객이 이 브리프를 받아볼 때에도 과연 그런 느낌이 들까?

- 허소리 : ..

- 소구라 : 고객의 눈높이를 생각해보게. 어제 그 양반과 충분히 대화를 해봤지 않은가? 특허출원은 몇 건 해본 적이 있지만, 특허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 수준은 유치원생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네. 그런 사람에게는.. 아마 모르긴 해도 이 브리프를 읽는다는 건 적잖이 어려운 암호를 해독하는 느낌이 아닐까 싶네. 혹은 자신이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열등감에 괴로워하게 될지도 몰라.

- 허소리 : (울상 ㅠㅠ..)

- 소구라 : 유치원생에게는 유치원생이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을 해줘야 하지 않겠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가령 유치원 아이들은 그림을 좋아하지. 애들에게는 이런 어려운 용어가 아니라 그림을 이용하는 게 훨씬 쉽지. 그처럼 이 사안의 경우에도 딱딱한 문장은 제쳐두고.. 제품의 사진이나 도면을 해당 부분만 추출한 다음, 그 곳의 구성요소를 드러나게 표시하기만 해도, 고객은 한 눈에 직관적으로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을 듯한데. 안그런가?

- 허소리 : 그~ 그~ 그렇습니다.

- 소구라 : 허변. 잘 알아두어야 할 게 있네. 우리 업무의 본질은 '설득'에 있다는 점이네. 설득에 의해 우리 일이 모든 과정이 원활히 굴러가는 것이지. 의뢰인 고객을 설득하고, 심사관과 재판부를 설득하고, 협상의 상대방을 설득하며 살아야 하는 운명일세.

표현력과 설득력이 변리사업이라는 마차의 추진력 즉 연료라고 생각하면 되네. 아무리 뛰어난 변리사라도 표현력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하면.. 연료가 떨어진 리무진 자동차와 다를 바가 없지.

허변의 저 브리프가 깔끔하게 잘 작성된 것은 맞네. 적어도 나를 설득하는 데는 매우 훌륭하지. 하지만 우리 유치원생 고객을 이해시키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 허소리 :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

- 소구라 : 설득력의 기초는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지. 유치원생에게는 무릅을 꿇고 말해야 하고, 심사관, 판사 등에게는 그들의 기술지식 수준과 권위를 모두 고려해서 말해야만 먹혀들어가지 않겠나?

- 허소리 : 맞습니다. 다시 작성해보겠습니다.

- 소구라 : 그렇게 하자구. 일단 '나는 할말을 다했다. 알아듣는지 여부는 상대의 책임이다.'라는 생각은 버리도록 하게. 우리의 책무는 상대를 이해시키는 것이라는 점 잊지 말게. 우리가 무엇을 말했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상대가 무엇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만이 중요할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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