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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재산권보호/특허의도

[특허의도] #23 특허는 탁(度)이다.

by 허성원 변리사 2021. 5. 2.

특허는 탁()이다.

 

한 모임에서 옆자리의 한 중소기업 CEO가 말했다. 어렵게 제품을 개발하고 특허까지 여러 건 받아두었다. 동일한 기술의 모조품이 나왔기에, 경고장을 보내고 고소도 하고 소송도 걸었다. 그런데 몇 년간 매달렸지만 결국 모두 패소하고 말았다. 분명히 우리 제품과 구조와 개념이 동일한 침해품인데, 그걸 막아낼 수 없다면 특허는 받아서 뭐하며 특허제도는 왜 존재하냐며 분개한다. 그런 분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

한 정나라 사람이 신발을 사고자 하였다. 그는 먼저 자기 발을 재어 탁(, )을 만들어 그 자리에 놓아두었다. 그런데 시장에 도착해서 보니 그 탁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다. 신발을 손에 든 채로 "내가 탁 가져오는 걸 잊었어요."라고 말하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탁을 가지고 다시 시장에 왔다. 그런데 시장은 이미 파해버려서 결국 신발을 사지 못했다. 누가 말했다. ‘어찌 당신의 발로 직접 신어보지 않았는가?’ 그는 탁은 믿어도, 발은 믿을 수 없어요.’라고 답했다.”

한비자(韓非子) 외저설좌상(外儲說左上) 편에 나오는 정인매리’(鄭人買履, ‘정나라 사람이 신발을 사다’)라는 고사이다. 당시의 제자백가들이 실질과 현실을 무시하고 융통성 없이 교조적인 언어나 관념적인 공리공담(空理空談)에 빠져 있는 어리석음을 풍자한 글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의 정나라 사람처럼, 본질인 은 믿지 않고 그 발을 잰 ()’만을 믿는 분야가, 지금의 우리 제도들 중에 있다.

그것은 바로 특허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특허는 발명을 독점하여 이용할 수 있는 권리이다. 권리 대상인 발명을 명확히 특정하기 위해, 출원 당시에 출원인은 발명 내용을 잘 정리한 명세서라는 문서를 제출한다. 명세서 중 특히 특허청구의 범위라는 부분은 발명의 가장 핵심 요지를 정하는 부분으로서, 그 기재 내용으로 특허권의 권리범위가 정해진다. 특허청구의 범위의 기재는 위 고사에서 말하는 ()’인 셈이다.

특허등록에 의해 특허청구의 범위라는 ()’이 확정되고 나면, ()’과 일치하는 기술은 특허침해로 인정되고, 그것과 어긋나면 특허침해를 벗어나게 된다. 이처럼 오로지 ()’만이 특허 침해 판단의 잣대가 되며, 발명자의 원래 발명 혹은 제품이 어떠했는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발명은 복수의 기술요소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므로 보기에 따라 다면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한 발명에 대해 사람마다 그 특징을 달리 정의할 여지가 많다. 정나라 사람의 은 발의 어느 부분을 잰 것일까? 물론 십중팔구 발의 길이일 것이다. 하지만 발이나 신발의 특징은 길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발의 폭, 발바닥의 면적, 발의 높이 혹은 체적일수도 있다. 혹은 발가락이나 발톱 등 일부의 모양이나 형상을 가리킬 수도 있다.

특허가능한 발명은 기존에 공지된 기술에 비해 새롭고 진보적인 기술이어야 한다. ‘새롭고 진보적인 기술에 대해 부여된 특허의 권리 내용 즉 은 발명자 혹은 특허권자가 인식하고 있는 발명과의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허권자는 자신의 특허를 그저 신발에 관한 것이겠거니 막연히 생각하지만, 특허 내용은 신발의 이나 높이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부동산인 땅은 지적도에 의해 특정된 경계 내에서만 소유권이 인정된다. 특허도 앞에서 으로 비유한 권리범위라는 면적 혹은 공간 내에서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땅'과 비슷하다. 땅을 소유한 사람은 경계측량 등을 통해 자신의 권리가 미치는 범위를 잘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특허권자는 자신의 권리가 어디까지 효력을 미치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고, 대체로 잘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권리자로서의 의무를 태만히 하는 것으로서, 권리 위에 잠자는 행위이다.

특허권자들이여, 시장에서 특허침해가 의심되면 '정나라 사람'을 생각하라. 침해품을 자신의 발명이나 제품과 비교하여 속단하지 말라. 집에 놓아둔 ’(특허)을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맞추어보라. 침해자도 마찬가지이다. 침해를 예방하거나 따져야 할 때는 내 제품을 상대방의 ''(특허)에 대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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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매리’(鄭人買履, ‘정나라 사람이 신발을 사다’)

한 정나라 사람이 신발을 사고자 하였다.
그는 먼저 자기 발을 재어 탁(度, 본)을 만들어 앉았던 자리에 놓아 두었다.

시장에 도착해서 보니 그 탁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다.
신발을 손에 든 채로
"내가 탁 가져오는 걸 잊었어요"
라고 말하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탁을 가지고 다시 시장에 왔다.
그런데 시장은 이미 파해버려서 결국 신발을 사지 못했다.
누가 말했다. '어찌 당신의 발로 직접 신어보지 않았는가?'
그는 "탁은 믿어도, 발은 믿을 수 없어요."라고 답했다.

鄭人有且置履者. 先自度其足而置之其坐. 至之市而忘操之. 已得履 吾忘持度 反歸取之, 及反, 市罷, 遂不得履. 何不試之以足 寧信度, 無自信也.
韓非子 外儲說左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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